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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 ‘한국에서의 학살’, “문명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박종완 기자 | 기사입력 2021/05/19 [08:53]

피카소와 ‘한국에서의 학살’, “문명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박종완 기자 | 입력 : 2021/05/19 [08:53]

▲ 강길모 미디어이슈 고문     

 

얼마 전부터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줄을 서서 대기해야 한다니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꽤 성황을 이루고 있는 모양입니다. 

 

피카소 탄생 140주년 기념 전시회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성황리에 개최되고,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그의 작품이 대표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세상이 달라졌음을 웅변해주는 일입니다. 1960년대 일간지를 보면, 크레파스 업자가 피카소란 이름을 상표로 사용했다가 서울지검 공안부에 의해 ‘반공법 4조 1항’을 적용, 기소됐다는 웃지 못 할 기사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온통 ‘반공투쟁’에 주력하던 시절엔, 프랑스 공산당원 출신인 피카소와 그의 작품이 푸대접을 넘어 범법으로까지 박해(?)를 받았던 셈입니다. 특히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주문,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이 어디 감히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전시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이 작품의 배경과 관련하여, 6.25 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그린 것이라고 알려진 바 있었습니다. 1950년 말, 6.25 전쟁 중 미군이 신천의 양민 3만5천명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것인데, 북한권력이 신천에 박물관을 짓고 60년 넘게 이러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북한권력 추종자들이 제법 많다보니, 신천사건이 미군에 의한 대표적 양민학살사건으로 얘기된 지도 오래된 듯합니다.  

 

그러나 1950년 10월부터 12월 사이에 벌어진 ‘신천 참극’은 미군의 일방적 양민학살이라는 북한권력의 날조된 거짓과 달리, 전쟁의 와중에서 개신교 세력 중심의 우파 세력과 북한 정권을 지지하던 좌파 세력 간 유혈 충돌이 원인인 것으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우파가 득세할 땐, 좌파 쪽 양민들이 죽어 나가고, 좌파가 득세할 땐 우파 쪽 양민들이 죽어나가는 ‘동족상잔의 야만(野蠻)’이 신천사건의 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카소가 신천사건을 배경으로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렸다는 얘기는 사실로 보기 어렵습니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그렸던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제목만 ‘한국에서의 학살’일 뿐, 구체적 사건과는 무관하며 피카소도 후일, 일반적인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에서 피카소의 이 작품을 소개하며 신천사건을 연관시키는 경우가 자주 발견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문명국가를 자부한다면, 이 땅에서 벌어진 ‘양민학살’들은 그 원인과 과정을 철저히 규명해서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재연되지 않을 역사의 교훈으로 정립해야 합니다. 특정 정파의 시각에서 양민학살 사건들을 일방적으로 접근하는 천박한 자세는, 그래서 반드시 경계해야만 할 일입니다. 북한권력이 신천사건을 미군의 잔인한 양민학살극으로 왜곡 선전하는 것은, 스스로 문명국가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할 뿐입니다.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을 서울 한복판에서 여유롭게 관람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은 그래서 참 ‘문명스럽다’ 할 것입니다. 미개하고 야만적인 자들이 값싼 이념의 찌꺼기나 천박한 편가르기 시각에 매몰되어 볼 수 없는 것들을, 문명사회의 세련됨을 갖춘 오늘날의 우리 국민들은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된 셈이니 참 뿌듯한 일입니다.

 

아울러 이 땅에서 벌어진 대규모 양민학살극 중 대표적인 제주 4.3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희생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억울한 영혼들을 위로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야만의 역사를 문명의 역사로 되돌리는 값진 노력으로 평가해야 마땅합니다. 

 

다만, 4.3과 관련하여 문재인대통령이 최근,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제주는 처참한 죽음과 마주했다”고 의미부여한 것은, 4.3사건의 본질과 대한민국의 문명사적 전환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서, 매우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일제의 패망으로 급작스럽게 도래한 해방정국과 남북한 양쪽에서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진정한 독립과 통일정부의 꿈’을 일찍 꿨다는 이유로 무참하게 죽어갔다는 대통령의 수사(修辭)는, 얼핏 4.3의 희생자들에게 나름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미사여구로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념’을 앞세운 폭력선동가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지극히 부적절한 접근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3에서 희생된 절대다수의 제주 양민들은 그 잘난 이념이 무엇인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에 왜 불참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고 관심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방해하면서 오히려 북한 김일성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제주 남로당 무장세력들과 대한민국 군경의 충돌과정에서 이유도 모른 채 편이 갈리고, 어처구니없게 죽어가야 했던 것이 절대 다수 희생자들의 처지였을 것입니다. 

 

제주 4.3에서의 양민학살을 대한민국 군경이 ‘통일정부를 열망하던 제주도민’들을 일방적으로, 무참하게 학살한 것이라는 전제가 맞는 것이라면, 문대통령의 치사(致辭)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 전제가 틀렸다면 대통령의 말씀은 나무를 뽑다가 숲을 태워버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북한권력이 신천사건을 일방적 왜곡으로 몰아가는 것과 본질상 다를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4.3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문명사적 전환이 오히려 이념의 찌꺼기에 의한 ‘야만의 부활’이라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비극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70여 년 전 제주에서 황망하게 스러져간 넋들을 제대로 추념하고자 한다면, 엉뚱한 미사여구로 양민학살의 동기와 ‘전범(戰犯)’들을 은폐하거나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학살의 주범들은  당시 대한민국 공권력에도 있었고 제주 남로당에도 있었습니다. 절대 다수가 ‘꿈과 명분’은커녕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던 그 실상을 정확히 기록하고,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정립하는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막중한 책무입니다. 

 

적어도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4.3에 대해 ‘진정한 독립’이니, ‘통일정부 수립’이니 하는, 지나고 보면 허울뿐인 정치슬로건들 때문에 고귀한 생명이 수천, 수만 명이나 죽어가야 했던 ‘야만의 역사’는 이제 멀리 역사의 어둠속으로 묻어버리자고 선언해야 옳습니다. 단 하나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는 ‘문명의 역사’를 열어가라는 것이 4.3의 교훈이요,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유산이라는 것을 얘기했어야 옳았습니다.

 

4.3의 영혼들을 위로한답시고, 4.3을 ‘통일을 염원했던 민중항쟁’으로 왜곡, 과장하는 것은 극렬분자들의 무장봉기와 양민학살을 미화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1948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했던 95.5%의 국민들을 ‘통일의 꿈’조차 없었던 우매한 국민들로 매도하는 것과 다름없게 됩니다. 

 

대통령이 4.3을 그렇게 표현하면, 대한민국은 ‘진정한 독립과 통일의 꿈’을 피의 학살로 짓밟고 태어난 나라가 되며, 그런 나라의 국민이라는 것도, 그런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도 수치가 될 뿐입니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넘어 온 나라가 다시 야만으로 가는 셈입니다.  

 

피카소를 반공법으로 내치던 대한민국에서, 이제는 이념의 찌꺼기보다 인륜과 문명을 우선하고 사랑하는 대한민국이기에 그의 작품도 환영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문명사적 대전환은 어쩌면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그만큼 절실하고 간절하게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피카소 작품 중 예술적으로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하지만, 오늘 날 대한민국의 문명과 세련미를 새삼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보다 더욱 훌륭한 작품이라고 박박 우기고 싶은 오늘입니다. 

 

 

 

박종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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